옷이 찢어지려고 해요

[대사의 베를린 일기]
정범구 주독일한국대사
   
뉴스 | 입력: 2018-12-09 | 작성: admin@admin.co.kr 기자

요새 외교부는 연말 공관장 회의 등을 앞두고 여전히 분주하다. 아르헨티나에서 열렸던 G-20 정상회의와 체코, 뉴질랜드 국빈 방문 대통령 순방행사까지 마치고 났으니 조금은 여유가 있을 법도 한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게다가 지난 11월 아세안 정상회의, APEC 정상회의 등을 위해 싱가포르 출장 중 뇌출혈로 쓰러진 김은영 남아태 국장이 아직도 일어나지 못하고 있어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아 있다. 외교부 내부망에는 이 참에 외교부의 열악한 인력구조를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올라오고 있다. 

“오래 전 한 공관장께서 과장 시절에 아세안 관련 회의 준비를 하다가 ‘이러다 죽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큰 행사를 준비하다 보면 간부나 직원들이 받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집중적으로 커지는 것 같습니다. 제도적으로 장치를 마련하여 밤새고 다음날 또 일하는 상황이 지속적으로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렇게 몸 바쳐 일하는 우리 조직의 현실과 외부평가 간 괴리가 큰 것, 참 안타깝습니다. 박막형 인력구조 시급히 해결되어야 합니다.”

2018년말 현재 외교부 정원은 총 2,328명이다. 그 중 1000명이 본부 및 국립외교원에 있고 전세계 164개(대사관 114, 대표부 5, 총영사관 45) 공관에 1,328명이 나가 있다. 

2,328명이라고 하면 이게 어느 정도 규모인지 감이 안 오지만 독일 5,622명, 프랑스 13,500명, 미국 23,887명 등과 비교하면 조금 감이 잡힐까? 인구가 우리보다 2.2배 정도 많은 일본은 6,065명이다. 인구는 우리보다 적지만(3,600만) GDP 규모가 비슷한 캐나다 외교인력은 6,620명, 인구가 우리 1/3수준인(1,700만) 네델란드 외교인력은 3,418명으로 집계된다.

이렇게 얘기해 봐도 역시 나열된 숫자 사이에 언뜻 현실이 잡히지는 않는다.

독일을 관할하는 외교부 내 부서는 유럽국 중유럽과이다. 중유럽과에는 사서와 행정직원, 과장 포함하여 모두 10명이 일하고 있다. 이 10명의 인원이 중유럽과 소관 28개국(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폴랜드, 체코,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헝가리, 세르비아, 루마니아 등등등)을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이 나라들에 나가 있는 23개 공관, 그리고 우리나라에 주재하고 있는 17개 대사관을 관리해야 한다. 게다가 유럽과는 8시간의 시차가 있으니 일하는데 거의 밤낮이 없다.

외교부의 인력구조는 과거와 비교하면 더욱 그 문제가 드러난다. 국력이 끝없이 커지고, 그에 따라 외교 수요가 팽창하고 있는데 반해 조직과 인력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사춘기에 급성장하고 있는 몸에, 옷은 여전히 초등학생 옷을 입혀놓고 있는 셈이다. 이러니 옷이 찢어지려고 하지 않겠는가?

남북한이 UN에 동시가입했던 1991년말 현재 외교부 정원은 1,730명이다. 오늘날과 비교할 때 지난 27년 동안 598명, 29%, 연 평균 1% 정도 인력증원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1991년(7,500$) 대비 우리 GDP는 지난해 29,152$로 400% 가까이 성장했다. 해외여행객 집계가 잡히기 시작한 1994년 378만명이던 관광객은 2017년 2,650만명으로 폭증했다. 무려 700%나 늘어난 것이다. 이렇게 늘어나는 외교수요에 그러나 인력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한국외교는 1991년 유엔 가입을 통해 질적으로 전환한다. 종래의 양자 외교 중심에서 다자 외교의 비중이 점점 더 커지게 된다. 

1991년 이후 우리가 가입한 국제기구들로는 국제노동기구(ILO, 1991), 세계무역기구(WTO, 1995), 제네바 군축회의(CD, 1996) 등 유엔 산하기구 5개가 있다. 그리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996), 상설중재재판소(PCA, 2000), 미주개발은행(IDB, 2004), 국제형사재판소(ICC, 2003), 한국에 그 본부를 유치한 글로벌 녹색성장연구소(GGGI, 2012) 등 정부간 기구 41개에 새로이 가입하였다. 

거기에 더하여 G20이니, ASEAN+3, MIKTA니 하는, 새로운 국가간 정상기구가 생겨나 그에 따른 외교 수요가 엄청나게 증가하였다. 최근에 와서는 북핵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다양한 외교적 작업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렇게 외교부에 들어와서 느낀 현실을 말하다 보니 어디선가 이런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다 힘들지, 요새 힘들지 않은데가 어디 있어?” 또는 “그래도 공무원들이잖아? 일반 국민들은 얼마나 힘든데?”, “결국 공무원 숫자 늘려 달라는 거 아니야?” 이런 소리들.

여러 가지 상황이 간단치 않아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힘든건 힘든 것이다. 아니 단순히 힘든 것 뿐 아니라 이 상태로는 나라의 위상에 맞는 외교를 펼쳐 나가기가 힘들다.

한국의 국제적 체급은 세계 10위권에 맞먹는 우람한 체급인데 거기에 걸치고 있는 옷은 과거 80위, 50위권 때 입고 있던 옷 그대로니 찢겨져 나가게 생기지 않았는가?

아직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외교부 김은영 국장 이야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왔다. 김 국장은 여성 최초로 지역국 국장을 맡았다. 

정범구 주독일 한국대사
정범구 주독일 한국대사

부부 외교관인데 서로 임지가 달라 떨어져 있는 때가 많았다. 남편인 이병도 심의관은 나랑 베를린에서 잠시 같이 근무하였는데 아들을 데리고 와 혼자 키웠다. 본부로 발령받게 되어 모처럼 가족이 함께 지내게 되었다고 우리가 모두 축하해 주었었다. 

그랬는데 지금은 먼 싱가폴에서 아내의 병상 곁을 지키고 있다. 

김은영 국장의 조속한 회복을 기원하며, 이 참에 외교부의 열악한 인력구조, 희생자가 나올 수 밖에 없는 환경에 대해 국민께 알리고 이의 개선을 위해 나도 힘을 보태 보려 한다.